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이탈리아 완전 수복: [[나르세스]] === [[파일:Erster_und_Zweiter_Gotenkrieg.png]] 550년, 이탈리아의 상황은 제국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의 동고트 왕국과는 달리 동원 가능한 병사 수가 동로마 측의 투항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적었으며, 그마저도 토틸라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은 아드리아해 연안의 안코나와 크로토네 등 위태로운 한줌의 도시들이었고, 크로토네는 포위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동로마 측의 보급 기지이자 로마 제국의 건설 이후 평온을 유지하던 시칠리아 마저 토틸라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토틸라는 남은 해안 도시들의 정복과 동로마 군대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4백여 척의 함대를 건조하였고, 그들을 파견하여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점령하고 시칠리아를 약탈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동로마 측이 반격을 시도하자, 동고트 함대가 그리스에까지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기까지 하였다. 뒤에 제시된 에피로스 습격과 같은 사건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지부진한 고트 전쟁을 마무리 짖기 위하여 일리리아에서 이민족 ([[불가르]], 헤룰리, [[랑고바르드족]])까지 끌어모아 2만 5천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달마티아의 살로나에 조금씩 집결하였고, 지휘관으로는 나이가 지긋하여 반란을 꾀할 가능성이 전무한 환관 [[나르세스]]를 선정하였다.(551년 여름) 이 소식을 접한 토틸라는 동로마 측의 병력 집결이 완료되기 전에 상륙거점으로 예상되던 안코나를 함락하여 교두보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551년 늦여름, 토틸라는 시칠리아를 떠나 북상하였고, 그의 군대는 안코나에 도달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고트 전함 47척이 해상 봉쇄에 가담하였다. 남은 3백여 척의 고트족 함대는 동로마 측의 의지를 꺾고 경고를 하고자 [[에피로스]] 지방과 [[이오니아]] 제도[* 코르푸 섬 + 케팔로니아 제도] 일대를 습격하도록 파견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결심만 더욱 굳히는 역효과를 낳았다. 한편, 라벤나의 사령관 발레리아누스는 천혜의 항구인 안코나의 함락을 방지하기 위하여 달마티아의 살로나에서 나르세스의 본대 도착을 기다리던 베테랑 장군 요한네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위급함을 알리는 서신을 받자마자 요한네스는 휘하의 경험 많고 숙련된 군인들이 배치된 38척의 구원 함대를 파견하였다. 발레리아누스도 라벤나에 배치된 12척의 함대를 직접 이끌고 합세, 동고트 측과 호각을 이루었다. 551년 가을, 50여 척의 연합 함대는 안코나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항구인 세나 갈리카에 정박하였다. 동고트 함대의 사령관 인둘프[* 본래 고트족 출신으로, 벨리사리우스의 근위대에 속하였으나 549년에 주군이 떠난 후 동족인 코틸라의 설득으로 인해 이전부터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인둘프는 동고트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다. 토틸라는 그에게 함대와 병력을 주어 535/6년에 동로마 제국이 점령한 달마티아를 습격하게 하였다. 인둘프는 자신의 전향을 눈치채지 못한 모비쿠룸, 라우리아테라는 두 요새에 위조된 벨리사리우스의 명령서를 보여주어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수비대 전원은 끔살되었고 동고트 군대는 주변 마을을 철저히 약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달마티아의 사령관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인둘프는 그들마저 격파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로마로 향하던 동로마 측 보급선 몇척을 나포하는 공까지 세워 토틸라에게 눈도장을 찍혔다.]와 기발[* 원래 동로마 장군이었다가 고트 진영으로 전향한 인물]은 비슷한 규모의 적을 보고선 바로 응전을 결심,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애석하게도 해전 자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멸실되었다. 다만 중세의 전함은 고대 그리스의 그것과는 달리 충각이 없었고 따라서 투석/화살 공격과 백병전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였는데, 선원의 숙련도와 진형 유지가 매우 중요하였다. 여기서 요한네스의 베테랑 수병들이 실력 발휘를 한듯하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전투를 '화살이 교환되고 근거리에서 창검이 번뜩이는', 해전이 아닌 육지전투에 가까웠다고 표현하였다. 한편, 급조된 동고트 함대의 선원들은 아직 조종에 서툴렀고, 결국 서로 배를 부딪히며 일부는 따로 격리되었고 나머지는 엉켜버렸다. 이로써 전투 결과가 정해진 듯하다. 동고트 측은 47척 중 38척이 침몰하는 대패를 겪었고, 두 장군 중 하나인 기발이 생포되었다. 인둘프는 나머지 배들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안코나를 향하여 도주하였고 도착한 뒤에는 전함을 불태우고 수병들을 육지의 포위군에 합류시켰다. 세나 갈리카 해전은 6세기에 지중해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으로, 이러한 규모의 격돌은 654년에 벌어진 마스트 (돛대) 해전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전투로 동로마 측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재역전'이라 표현되는 이탈리아 평정의 신호탄으로 작용하였다. 역사가 아치볼드 루이스는 이 승리로 동로마 측이 제해권을 회복하게 되자 나르세스의 이탈리아 평정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안코나 포위군도 해전의 패배 소식을 듣고 동요하다가 얼마 못가서 포위를 풀고 내륙의 아욱시뭄(오시모)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전쟁의 추가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기운, 큰 전환점이었다. 안코나와 라벤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나르세스는 살로나에 도착하였고,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진입할 것을 선포하였다. 동고트 해군이 참패를 겪었다고 하지만 아직 3백여 척이 남아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실패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 터이기에 병력 보존을 위하여 별다른 변수가 적고 안정적인 육로를 선택한 듯하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바랬기에 나르세스에게 전권을 부여하였다. 그중에는 황실 금고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권도 있었는데, 재정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나르세스는 병사들의 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는 등 장병들의 사기 진작에 힘썼다. 따라서 이탈리아 원정군은 오랜 전란에 지친 토틸라의 군대에 비하여 체력적, 정신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코피우스의 표현에 따르면 3만 3천에 달하던 그 군대는 제국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 원정군의 대다수는 로마인이 아닌 '야만족' 출신이었지만, 나르세스의 풍족한 대우에 감격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551년 가을부터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행군을 시작한 원정군은 무리하지 많고 천천히 나아갔다. 보급선도 해안을 따라 나아갔는데, 동고트 함대에게 종종 시달렸으나 세나 갈리카 해전 이후 제국 해군이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회복하자 별 문제가 없었다. 여느때 처럼 바다를 건너올 것으로 예상하였던 토틸라는 의표를 찔렸고, 뒤늦게 그들을 방해할 분견대를 파견하였지만 모두 손쉽게 격파되었다. 토틸라는 동로마 제국의 동맹 부족이자 보조군이 랑고바르드 족인 점을 포착, 그들의 적인 프랑크 족에게 동맹을 제의하였지만 그들은 토틸라가 패사하고 동고트 왕국이 실질적으로 멸망한 후에야 이탈리아에 도달한다. 그동안 요한네스의 조언을 받으며 천천히 모든 저항을 분쇄하며 진군한 나르세스는 12년 만에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552년 6월 6일) 그 달에는 원정군 전부가 라벤나에 집결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